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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5월 2014

[Column : 날마다주님과 201401/02호 30주년 특별기고] 날주, 제대로 밝히지 못한 출현의 비밀 / 이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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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간사 사역

'날마다 주님과'라는 이름보다 '날주'로 더 잘 알려진 SFC 성경묵상 교재를 발간하기 시작한 지 내년 6월이면 꼭 삼십년이다. 84년 6월호가 첫 번째 작품이었으니까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이름을 짓고 출판을 시작한 당사자로서 정말 감회가 새롭다. 언제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가. 30년쯤의 세월이 흐르니 '날주'는 SFC와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몸을 이루며 학원선교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시작은 그렇지 못했다.

필자가 SFC 간사가 된 건 나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부산대학교 2학년 시절, 3학년 중에 헌신할 사람이 없어 엉겁결에 SFC위원장을 지낸 것이 내가 공식적으로 SFC와 관계하여 책임 있는 자리를 맡은 경험의 전부였다. 그런 내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SFC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얼거리듯 아내에게 "내가 SFC 간사를 한번 해야 하나?"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났다.

부산대학교 SFC를 그냥 '부산대 기독학생회'로 바꾸려는 논의를 하던 바로 그날, 나는 군에서 막 제대한 몸으로 SFC모임에 참석하였고, 그 논쟁에 뛰어들어 SFC 해체를 막아낼 수 있었다. 3년 뒤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칠 무렵 나는 강용원 고신대 교수를 부산지역 SFC 전임간사로 옹립하고, 교회로부터 재정을 모으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마침 그해 고신대 전임강사로 임명을 받게 되자 간사 사역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바람에 결국 그 자리를 내가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때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 나를 SFC 간사가 되게 하였고, 어쩌면 후일에 닥칠 모든 일의 출발점이 되었다. SFC 간사가 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통만 남은 SFC

1981년 3월 SFC 역사상 처음으로 부산지역 전임간사로 취임하던 즈음의 SFC는, 전통은 번듯하였지만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해 가을에 전국 대표간사가 되었으나 변변한 사무실 한 칸이 없었다. 부산 남교회 중고등부실 뒤켠을 가로막아 사무용 책상을 놓고 간사 사역을 시작한 후, 그 유명한 남교회 반지하방을 얻어 SFC의 아지트로 삼았다. 겉모양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내용도 없었다. 교회나 학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재도, 심지어 SFC를 대학에 알리는 안내장 한 장도 없었다. 여태껏 들은 이야기로, 중학교 1학년때부터 따라다닌 각종 SFC 모임에 대한 경험으로 간사라는 역할을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SFC는 처음부터 교회 중심이라는 명확한 지표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한예수교 장료회 고신총회의 교육부 산하에는 겨우 세 분의 SFC 담당위원이 총회와의 끈을 이어갔다. 나는 아무래도 이런 체제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중심의 SFC라고 하면 교회가 좀 더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논의되었던 대로 총회산하에 상설 'SFC지도위원회' 제도를 만들어 줄 것과 6개 지역(전라, 대전, 서울, 부산, 대구, 경남)에 전담 간사를 두도록 총회 교육부에 건의하였다. 제31회 고신총회는 교육부의 건의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의외로 너무 쉽게 일어난 일이었다.

SFC는 오랫동안 부산이 본거지였다.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서울 중심이었지만, 80년대까지 SFC만은 부산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나보다 앞서 고등학교 교사직을 버리고 서울지역 학원 전담 간사로 몸을 던진 안용운 평신도 간사와 신학교 한 해 후배로 82년에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SFC에 헌신한 전성준 간사, 그리고 나까지 셋은 52년생 동갑내기로 기막힌 조합을 이루었다. 모든 일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앞세우는 영의 사람 서울 안 간사와, 현장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모든 일에 해답을 갖고 있는 실무 총무형 대구 전 간사, 그리고 계획, 결단, 돌파를 주 무기로 삼고 사는 부산의 필자는 역할 분담을 기막히게 해내었다. 

간사로 뛰어든 지 2년째가 되는 1983년이 되자 아무래도 본부를 서울로 옮겨야 한다는 데 세 간사의 의견이 모아졌다. 지도위원회도 서울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원하는 터라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서울에 어떻게 근거지를 얻느냐는 것이었다. 간사의 주택은 어떻게 구하며, 사무실은 어디다 둘 수 있을지 막막했다. 이때 지도위원회가 위력을 발휘했다. 위원장 윤지환 목사는 이선 목사가 광주에서 옮겨간 왕십리의 서울제일교회에 사무실을 마련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전화를 놓기도 힘든 때에 백색 전화를 비싼 돈을 들여 사주었다. 문제는 내가 옮겨올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돈이 한푼도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하고 곧바로 신대원을 마치기도 전에 결혼한 주제에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정해진 간사 생활비가 달마다 제대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울영동교회를 섬기며 부동산업을 하는 정진우 집사가 당시 2,500만 원 하던 전세 아파트가 갑자기 800만 원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박은조 목사에게 알렸고, 영동교회가 그 돈을 빌려주어 대치동 청실아파트 32평형을 간사사택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은근히 내가 SFC 간사직을 포기할 것을 기다리던 분들도 있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서울 한복판으로 이사하여 전국대표 간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날마다 주님과 84년 6월 창간호, 그리고 7, 8월호

<날마다 주님과 84년 6월 창간호, 그리고 7, 8월호>

사진 2 (1)

<창간호에 수록된 머릿말>

 

책을 만들기 시작한 SFC

이 일은 SFC 수양회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열린 1983년 여름 수양회 이후에 일어났다. 3천5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인 수양회를 열면서 처음으로 SFC 운동의 기본원리를 담은 『SFC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내었고, 한창 일어나던 복음송 바람을 타고 '시와 찬미'라는 이름을 붙인 복음 찬양집을 발간했다. 현재 9집까지 발간한 『시와 찬미』(시찬) 1집은 이곳저곳에서 악보를 주워다가 싣는 수준이었다. 물론 82년에 시작한 창작 복음송 경연대회 수상작도 포함되었으니, 다행히 100퍼센트 남의 것은 아니었다. 저작권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만들어내고도 스스로 대견해했다. 당시 전국 SFC 위원장이었던 고려대 이세령 군(현재 목사)이 을지로 인쇄소를 드나들며 수고를 많이 했다.

그런데 1984년을 맞으면서 나는 대학생대회를 무주구천동 야영장에서 열어보자고 억지를 부렸다. 전두환 대통령이 일만 명의 당원을 모아 대회를 열었던 대형 야영장이긴 하지만 우리라고 못할 일이 무엇이냐고 학생들을 부추겼다. 전국SFC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려면 뭔가 흉내라도 내보아야 할 것 같았다. 우리의 요구를 한마디로 일축하던 야영장 당국도 결국은 우리를 말리지 못했다. 물론 대집회장에서는 한 번도 모임을 갖지도 못할 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넓은 야영장을 오르내리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호기(豪氣)를 키우고 싶었다. 그 대회를 앞두고 세 번째 우리 책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이 '날마다 주님과'라 이름 붙인 묵상교재였다. 당시 SFC는 성서 유니온이 출판하는 묵상교재인 『매일성경』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고신 교단은 『매일성경』사용에 관하여 날카로워져 있었다. 윤종하 총무의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교단 지도부는 매우 불편해했다. 십일조, 안식일, 등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1985년 9월 총회는 마침내 『매일성경』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날마다 주님을 꿈꾸다

대학 SFC에서는 아침마다 기도모임을 갖도록 권고하고 있는데도 교재조차 없으니, 아예 우리가 사용할 묵상교재를 스스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게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선 매달 출판한다는 사실 자체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총회 지도위원회의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돈이 드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매달 책을 만드는 일을 허락하겠는가? 고민했다. 학원 SFC의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내용이야 세월 가면서 헌신할 간사들이 많이 생겨나면 자연히 나아질 수 있는데, 역시 돈의 문제는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 했다.

절차를 제대로 밟아 상세하게 보고하면 틀림없이 거절당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쉬운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지도위원장인 정승벽 목사님께 84년 4월 어느 날 아침에 전화를 걸었다. "대학에서 아침 모임을 하자니 아무래도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데 사용할 자료가 필요합니다. 간단한 책자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묵상교재가 요즘처럼 일반화되어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목사님은 그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화기를 통해 들은 내용은 그냥 프린트 몇 장 하는 줄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니 허락이 쉽게 떨어졌다. 그렇게 하여 『날마다 주님과』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오래 계획되고 세밀하게 준비된 가운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슬쩍 몰래 태어나다시피 하였다. 그게 80년대까지의 SFC 운동 상황이었다.

그런데 출판을 시작하고 보니 매달 만드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누가 교재를 쓰며, 어떻게 발행하며, 배포하고 수금할 것인가? 아찔했다. 처음 교재는 그냥 본문을 옮겨쓰는 수준으로 간단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성경본문을 그냥 타이핑 하거나, 영어본문은 기드온 성경을 복사해서 오려 붙여 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서공회에 알아보는 것도 없었다. 을지로 인쇄골목으로 직접 찾아가 거래처를 찾고, 인쇄하고 배달하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각 지방사무실로 배송하기도 하였다. 내용이나 편집이라는 게 지금보면 우스울 정도로 초라하다. 그걸 학생들이 돈을 주고 사서 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강제하다시피 여름, 겨울 수양회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었다. 단지 우리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수양회 경비에서 발행비를 의무적으로 떼어내기도 했다. 그래도 빚은 쌓여갔다.

1985년 4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까지 1년여 동안 책을 만들고 나누고 돈을 걷고 하면서 늘 인쇄소에 밀린 빚을 계산하며 살아야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영국으로 떠나는 날까지 갚지 못하고 남은 빚이 50만원 정도였다. 그런데도 후일 내가 떠나고 난 다음 당시 지도위원장이었던 모 목사님은 홀로 우리나라에 남은 아내에게 마치 내가 출판비에서 남은 돈이라도 챙겨 나간 것처럼 말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만 4년을 간사로 봉사한 내게 퇴직금은 커녕 차비도 보태주지 못했으면서 의심까지 했다는 소식은 오랫동안 나와 내 아내를 무척 힘들게 하였다.

유학을 떠나면서 나는 후임 대표간사인 오병욱 목사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날주'만큼은 꼭 지속적으로 발행할 것을 부탁했다. 우리 SFC는 학생들에게 캠프장 건설 등 많은 약속을 했고, 헌금도 받았지만 제대로 실천해내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중심의 SFC로서 학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제목을 나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것만큼은 꼭 지속할 것을 다짐했다. 다행히 오 목사는 해임될 때까지 그 약속을 지켜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디자인과 편집의 전문인들이 생겨났고 훨씬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날주가 얼마나 보급되는지, 학생들이 얼마나 읽고 묵상하는데 도움을 얻는지 알지는 못한다. 30주년이 되면 통계도 제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신 총회가 발행하는 『복있는 사람』과 본문을 함께 하고, 2개월에 한 번씩 발행하는 등의 변화를 겪기도 한 우리 '날주'가 앞으로 단순한 성경 묵상의 장을 넘어 SFC 운동원간의 소통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넓혀가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며 날마다 주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 '날주'를 통해 그 소망이 갈수록 더 아름답게 영글어가기를 기도한다.

 

이성구 목사(전 SFC 대표간사, 시온성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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