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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월 2014

[Review] 타당한 확신(Proper Confidence) : 기독교 제자도의 믿음, 의심, 그리고 확실성 / 타당한 확신, 레슬리 뉴비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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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 저 / 박삼종 역
 
 

타당한확신

 
* 이 책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장 믿음, 
지식에 이르는 길
2장 의심, 확실성에 이르는 길
3장 확실성, 회의주의에 이르는 길
4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
5장 오직 은혜로
6장 성경
7장 오직 믿음으로
 

 

현대사회에 복음은 의미가 있는가?

얼마 전 오늘날 우리 사회의 20대에 관해 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부제는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었다. 너무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오늘날의 20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 단어가 다름 아닌 '괴물'이다. 그들은 취업이라는 경쟁에 내몰린 공감 불능의(타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현저히 떨어진) 투사들이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의 시각에 머물러 개인을 그의 능력과 학력에 따라 서열화하고, 따라서 차별은 당연하고 개인의 고통은 그 자신의 문제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득 내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곧 "이러한 20대들에게 과연 기독교의 복음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 질문은 "만일 기독교의 복음이 이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면, 곧 기독교의 복음이 이들이 처한 삶의 현실에 반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에 대한 대답을 쉽게 찾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관념화된 명제들만 거듭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념화된 명제들은 생명력을 잃은 채 화석화되어 더 이상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줄 이야기도, 보여줄 삶과 공동체도 없게 되었다. 따라서 당연하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발에 밟히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대체 무엇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나는 이 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뉴비긴의 기독교 변증

20년 전 내가 20대였을 때, 한창 쉐퍼(Francis Schaeffer)의 책들을 읽으며 현대세계에서 기독교 복음을 어떻게 변증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신선하게 다가왔던 사람 중 한 명이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었다. 그는 20세기 중반 30년간 인도에서 선교사로서 사역하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당시 서구사회가 보여주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배교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 서구사회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원화된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 기독교 복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많은 저술 활동들을 했다. 그런데 그의 저술들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모든 지식 또는 진리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의심"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지식은 (데카르트가 주장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과 그에 따른 인격적인 '헌신'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진리판단에 있어서는 과학적인 방법론만을 유일한 근거로 내세우는 현대사회의 지적체계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인격적인 삶과 헌신을 수반한 믿음의 증언

이 책, 『타당한 확신』에서도 뉴비긴의 주장은 다시 한 번 강하게 반복 된다 : "믿음과 의심, 이 둘은 앎에 대한 전체 구조에서 그들의 타당한 역할들을 가진다. 그러나 믿음이 우선이고 의심은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의심은 우리의 의심을 지탱하는 믿음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든 근본주의자든 모두 동일한 오류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곧 두 진영 모두 데카르트의 의심할 수 없는 합리성 위에 기반을 둔 채 자유주의자는 모든 것은 의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근본주의자는 진리는 의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합리성을 포기한다면, 두 진영은 서로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곧 의심이 아닌 믿음과 계시의 방법으로 진리를 다루는 한편,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이 아닌 인격적인 삶의 헌신과 관련된 확실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되어 우리에게 보이신 진리는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 영원한 또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이성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교회)에 의해 고백되고 실천된 삶과 헌신으로 증언되는 진리이다. 이러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되돌릴 수 없는 헌신 안에서 끊임없이 다시 새롭게 되고, 다시 인식되고, 다시 재연되는 진리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타당한 확신은 징명할 수 있으며,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확신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부르심, 곧 '나를 따르라'라는 부르심을 듣고 대답했던 사람의 확신이다."

 

새로운 출발점

이 지점이 데카르트의 합리성을 벗고 믿음으로 진리를 대할 때,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여기서는 더 이상 공격적이고 무례한 복음을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 겸손하고 참회하는 증인들의 삶만 보일 뿐이다. 더 이상 삶과 동떨어진 관념적인 명제들만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보다 실제적인 삶에 반응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들로 넘쳐나게 된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복음과 그에 대한 확신이라면, 분명 오늘날의 '괴물'같은 20대들에게 충분히 해줄 이야기가, 그리고 보여줄 삶과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이와 같은 '새로운 출발점(Arche, 아르케)'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리와 믿음, 그리고 그에 따른 삶에 대한 새롭고도 급진적으로 수용해야 할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SFC에서 번역하여 출간한 레슬리 뉴비긴의 또 하나의 책,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도 함께 읽으면 뉴비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의현
SFC출판부 대표
 
*본 글은 SFC 총동문회에서 발간한 <개혁신앙> 3호(2013년 10월)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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