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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6월 2014

[Review] 성찬, 시대의 배고픔을 채우는 잔치 /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피터J.라잇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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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먹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면 이보다 더 강력한 저주가 어디 있겠는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젖꼭지를 찾아드는 갓난아기의 그 열정을 누가 비난하겠는가. 생존을 위한 노동의 막바지에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잡아든 수저의 움직임을 누가 천박하다고 할 것인가. 배고픔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 실존'이자 인간 존재의 '현실적인 상징'이다. 그래서 배고픔의 자리에 베풀어지는 음식은 그 어떤 것보다 넉넉한 은혜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성찬은 이 기본적인 욕구를 담아내고 그것을 극복하는 의례이어야 한다. 풍족해 보이는 시대 가운데 여전히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는 배고픈 현실에서 성찬에 대한 묵상을 되짚어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배고픔에 대한 채움의 신학은 성찬 신학이 현대 한국 개신교 교회에 바르게 자리 잡지 못한 것만큼이나 오해되고 실천되지 않는 죽은 상징이 되었다. 

 

배고픔은 서로 의존하게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성찬에 대한 조직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을 넘어 성경신학적이고 일상적인(사회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성경신학적인 접근을 통해 성경의 현실적 이야기를 생생하게 살려내고, 일상적인 접근을 통해 성찬에서 중요한 매개가 되는 떡과 포도주의 사회학을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성찬은 교회사적으로 무거운 신학적 주제로 등극하기 이전에 성경의 역사 이야기에서 이미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던 주제이다. 그리고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일상적 음식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며, 일상적 음식은 일정한 종교적 의식을 통해 성경의 이야기에 편입되는 소위 '성과 속의 조화로운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다. 이 책에서 성찬신학은 떡과 포도주라는 요소에만 집중하는 물질적인 신학 자체의 문제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성찬 신학은 주님의 성찬 상 위의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동시에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참여함으로써 '관계적인 신학' 또는 '공동체적 신학'이 된다. 말하자면 성찬은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요소와 더불어 참여하는 자들 간의 상호 관계도 함께 부각된다. 왜냐하면 성찬의식은 창조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리하는 '공동체적 시간이자 공동체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성찬은 하나님에 대해, 타인에 대해 상호의존적 존재를 확인하고 고백하는 자리인 것이다.

사실 배고픔은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자연적인 조건 가운데서도 먹이로 자신이 희생되는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포식자의 생명유지가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먹이사슬 구조에서 '상위' 존재라고 하더라도 결국 '하위' 존재의 제공된 기관 없이는 그 고상한 실체를 유지할 수 없다. 말하자면 배고픔을 해결하는 구조 안에는 공생과 공존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배고픔은 상대를 필요로 한다. 배고픔을 겪고 있는 자에게 자연은 먹이를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고픔을 달래고 같은 종의 희생을 당분간 차단한다. 음식으로 제공되는 존재 없이 이 세상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 고귀한 희생을 먹고 배고픔을 해결한 이는 그 권리에 걸맞은 삶을 보장 받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할 의무도 지닌다. 살아남은 자의 영광은 죽은 자의 희생이라는 거름 위에서 맺힌 열매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갈증을 채우는 음식은 고결하고 '거룩하다.' 그런데 음식을 제공하는 자, 선물로 먹을 것을 주는 자, 그러한 공동체는 더욱 '거룩하다.' 단순히 강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잡아먹히거나 또는 자기 자신만의 배를 채우는 것은 차원이 낮은 음식 해결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찬은 공동식사이며 잔치이다.

성찬의식을 상호 의존성과 돌봄의 책임이 강조되는 의식으로 보게 되면 저자가 성찬이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쉽게 알게 된다. 저자는 러시아 정교회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의 말처럼 주님의 성찬은 먹고 마시는 이 세상(노동과 거래, 가정과 친구, 정치와 권력 등)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형성해가는 재료라고 말한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먹는 것은 인간의 위치에 대한 고백이자 이 세상과 연합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고 외부 존재로부터 힘을 공급받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다른 피조세계에도 의존적이다. 먹는 것은 일종의 권위의 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자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완성되어 나가고 있다는 고백은 그것을 어떻게 먹고 마시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찬에서 먹는 자의 권위는 독특하게도 포식자의 권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보편적인 음식인 떡(빵)과 포도주를 취하신 이유는 그 음식이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제공할 수 있고 누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다. 특히, 빵을 굽고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기술적이고 변혁적 자세를 부여한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창조적인 노동을 투여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음식에 다른 사람을 초대한다. 이 과정에서 '음식의 테크놀로지'가 '성찬의 미학'과 함께 만난다. 일상적인 용도의 빵과 포도주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음식 제공자의 노동은 창조적인 산물이 되어 공동식사에 배설된다. 함께 앉은 자리에서 제공한 자의 음식을 칭찬하고 그것이 일상의 배고픔을 해결함으로써 함께 만족한다. 공동식사는 칭찬과 담소로 가득한 잔치가 된다. 여기에 삼위 하나님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거룩한 공동식사가 된다.

예수님이 배설하셨던 최후의 만찬이나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예는 공동식사의 성경을 잘 보여준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공동식사였다. 그 자리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고 자리를 떤 가룟 유다는 예수님 자신의 몸과 피를 선물로 제공하는 혜택을 오히려 '저주의 먹거리'를 준비하기 위한 은 삼백과 맞바꾸었다. 바울은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향해 공동식사인 성찬에 대한 주의를 요청했다. 협력과 상호 의존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은 성찬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성찬은 공동식사이므로 그곳에 화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죄를 해결하는 정의의 식사이며 궁극적으로 죄를 해결하는 방향을 지시하는 평화의 식사이다.

성찬의 미학은 함께 나누어지는 식사라는 데 있으며 그 미학은 참여자들의 갈증을 함께 채움으로써 샬롬을 구현할 때 완성된다. 서로 음식의 선물을 갈망하지 못하는 교회와 공동체는 온전한 평화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동식사의 기쁨이 상실되고 '창조적인 음식 장만의 손대접'이 사라진 공동체에 온전한 교제와 연합은 불가능하다. '음식의 선물'을 제공하는 자에게 끌리고 궁극적인 음식 제공자인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교제, 그것이 성찬의 공동식사와 잔치의 의미이자 실체이다. 성찬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을 공동적 관계맺음으로 끌어당기는 미학적 역할을 수행한다.

 

희생적 사랑의 실천적 의식을 수행하라

진정한 잔치로서의 성찬은 가장 작은자(배고픈 자)들을 찾으시는 구원의 표식이다. 구원받은 표식으로써 이기적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축하잔치 자리가 아니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갈망을 담고 있는, 배고픈 자들을 채우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이다. 배고프고 갇히고 포로된 자의 궁핍함을 채우는 (의존적인) 약자들을 위한 잔치이다. 부정한 음식과 부정한 사람 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음식으로부터 멀리해야 했던 바리새인들의 분리전략과는 거리가 먼 약자들을 구분하여 그들을 채우는 거룩한 잔치이다. 물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부자는 없으므로 모든 인간은 잔치에 초대되고, 초대되어 마땅하다.

그래서 성찬은 세상을 향하여 열려있다. 교회만을 위한 식사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잔치이다. 거리와 어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한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운다. 교회는 "죄인들을 초청해 함께 먹고, 주님은 그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자신의 식탁 밖으로 우리를 보내신다. 이로써 안과 밖이 주님의 성찬에서 화해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향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공동식사를 잔치로 만들어내며 그 잔치는 세상 끝까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혜택이 공유되게 한다. 따라서 성찬은 단순한 가시적인 기념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제자들의 희생적 삶의 실천적 모델이자 그런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 공급처이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식사로서의 성찬은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이 초대되어야 하는 잔치인데,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희생적 헌신과 사랑의 개입없이 이 잔치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찬의 반복된 수행이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런 희생적 사랑의 실천을 반복적으로 훈련하기 위해서다. 성찬이 소위 '구원의 징표'로서 단순히 '가르침'의 수준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제자 공동체를 위한 역동적인 '훈련'이 되게 해야 한다. 성란은 상징이나 기념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한 실천이며 훈련의 과정이다. 성찬이 밋밋하고 형식적인 종교적 의식으로 제한되지 않으면서도 성찬의 성경적 의미를 살리는 방법은 성경의 성찬적 의식을 이야기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공동체적 삶으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방법 밖에 없다. 성찬이 배고픈 자들을 실제적으로 채우는 현실적인 제자도의 실천이 되게 해야 한다.

 

의식(ritual)과 삶이 만날 때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전수한 종교적인 의식 중에 가장 중요한 의식은 세례와 성찬이다. 개신교가 상대적으로 성례보다 말씀을 강조하는 데는 중세시대의 종교적 계급구조에 대한 반감과 의식의 미신화에 대한 경계가 강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는 고대 교회의 영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것은 의식과 삶을 관계 맺게 하는 장치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종교적인 것을 무시하다가 영성도 버린 격이다.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개인의 고립은 골이 깊어지고, 관계의 갈증은 증폭되어간다. 계약적 관계가 난무하고 파편화된 개인의 허전함도 함께 깊어만 간다. 개인과 사회 모두 마른 광야 같이 가물어 있다. 삶과 영성의 일치에 대한 설교와 강의는 넘쳐나지만 정작 그 외침은 공허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그 외침과 내용을 담아낼 그릇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교회는 너무 세속화 되었다. 삶의 욕구에서든 삶과 문화의 양태에서든 그 어디에도 우리의 '풍성한 나눔의 음식'의 정체를 드러낼 통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영성과 의식에서 강조되었던 기독교의 정체성을 현대의 감각 안에서 담기 위해, 성찬의 정신과 이야기는 한국교회에 무엇을 던져줄까. 교회사에서 이전 세대들이 실패한 형식을 단순히 답습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일부가 버려지지 않으면서 그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배고픈 자들' 즉 '주린 자들'을 채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세속'을 '거룩'으로 담아내는 장치를 '현실적(real)이면서 의식적(ritual)으로' 담아내는 구조를 세상과 공유하는 작업이 실험되어야 한다. 성찬의식은 이런 다양한 실험적 형식을 위한 모델이다. '배고파하는 세상'을 채우기 위해 이런 접목을 고민할 때이다.

 

 김성민 / SFC출판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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